스토리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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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 수도

[  臨時首都  ]

“ 1950년 8월 18일부터 1953년 8월 15일까지 임시 수도로서의 부산. ”

“임시 수도” 관련 부산일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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可憎(가증)! 38全線(전선)에 傀儡軍(괴뢰군) 南侵(남침) 我軍(아군) 態勢(태세)는 萬全(만전)

발행일 : 1950년 06월 06일  |  01면(01판)

해설 : 부산일보에 처음으로 언급된 6.25전쟁 발발기사. 625발발 이틀 후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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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규모 작전수행상 일부행정기관 부산으로 임시천도

발행일 : 1950년 08월 08일  |  01면(01판)

해설 : 6.25전쟁 발발로 임시로 수도를 부산으로 이전.1950년 8월 18일 이전, 21일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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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電車(전차)도 登(등)? 臨時(임시) 首都(수도) 點描(점묘)

발행일 : 1951년 08월 08일  |  02면(01판)

해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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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田(대전) 遷都(천도)와 輿論(여론)

발행일 : 1951년 11월 11일  |  02면(01판)

해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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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土防衛와 再建에 全力

발행일 : 1953년 09월 09일  |  01면(01판)

해설 : 국회가 1953년 9월 1일부로 환도에 따른 대국민 성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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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수도에서 평화수도로-임시수도대통령관저

발행일 : 2018년 03월 03일  |  25면(01판)

해설 : 최근 기사로 본 임시수도 시절 대통령관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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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수도에서 평화수도로-임시수도 정부청사

발행일 : 2018년 03월 03일  |  25면(01판)

해설 : 최근 기사로 본 임시수도 시절 정부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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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수도에서 평화수도로-국립중앙관상대

발행일 : 2018년 04월 04일  |  25면(01판)

해설 : 최근 기사로 본 임시수도 시절 국립중앙관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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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수도에서 평화수도로-부산근대역사관

발행일 : 2018년 04월 04일  |  25면(01판)

해설 : 최근 기사로 본 임시수도 시절 부산근대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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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수도에서 평화수도로-하야리아

발행일 : 2018년 05월 05일  |  25면(01판)

해설 : 최근 기사로 본 임시수도 시절 하야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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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수도에서 평화수도로-미8군사령부

발행일 : 2018년 05월 05일  |  25면(01판)

해설 : 최근 기사로 본 임시수도 시절 미8군사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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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수도에서 평화수도로-유엔공원

발행일 : 2018년 06월 06일  |  25면(01판)

해설 : 최근 기사로 본 임시수도 시절 유엔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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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수도에서 평화수도로-부산항제1부두

발행일 : 2018년 06월 06일  |  27면(01판)

해설 : 최근 기사로 본 임시수도 시절 부산항제1부두

개설

임시 수도는 본래의 수도가 전쟁 등에 의하여 점령되거나 위험에 처했을 때, 정부에 의해 임시로 수도의 기능을 하는 도시이다. 부산은 6·25 전쟁이 발발한 1950년 8월 18일~10월 27일, 그리고 1·4 후퇴로 1951년 1월 4일~1953년 7월 27일까지 대한민국 정부의 임시 수도였다.

6·25 전쟁이 발발 후 1950년 8월 18일에 정부 기관이 부산으로 이전되었다. 부산시 서구 부민동[현 부산광역시 서구 부민동]의 경상남도청을 임시 중앙청으로 정하였다. 부산시 청사에는 사회부와 심계원·고시위원회·문교부를 두고, 남전(南電) 경남지부에 상공부를 두었다. 국회는 부산극장에, 사법 기관은 부산지방법원에, 검찰 기관은 부산지방검찰청에 두었다. 그 외에 중앙에 있던 경제·사회·문화·금융·교육 관련 기관들도 부산에 자리를 잡았다. 미국 대사관은 부산 미국문화원에 자리 잡았고, 각국의 외교 기관들도 부산에 자리 하였다. 정부는 9·28 서울 수복 후 서울로 환도하였다가 1·4 후퇴로 다시 부산으로 옮겨졌다.

주요 사건

임시 수도 기간 중 부산에서는 ‘국민방위군 사건’, ‘거창 양민 학살 사건’, ‘부산 정치 파동’, ‘발췌 개헌안’ 등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발생하였다. ‘국민방위군 사건’은 국민방위군으로 소집된 만 17세 이상 40세 미만의 청장년들이 부산·경상남도·경상북도 지역으로 이동·훈련 중 국민방위군 간부들의 횡령으로 보급품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아 약 5만 명의 군인들이 아사·동사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관련자 5명이 처형되고 국민방위군은 해체되었다.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은 지리산 지역의 공비 토벌 차 파견된 국군 제11사단 9연대 3대대장 한동석 소령과 그 부대원들이 공비와 내통한다는 이유를 들어 이 곳 주민 600여 명을 집단 학살한 사건이었다.

개헌과 대통령 선거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은 야당과 무소속 세력이 다수를 차지한 국회에서 간접 선거를 통해서는 재선이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1951년 11월 30일 대통령 직선제와 국회 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 개정안을 제출하였다. 그러나 이 개정안은 1952년 1월 18일 표결 결과 찬성 19, 반대 143, 기권 1표로 부결되었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과 그의 지지 세력들은 각 지방 조직을 총동원하여 ‘개헌안 부결 반대 민중 대회’를 개최하였다. 아울러 개헌안에 반대한 의원들이 민의를 배반하였다고 주장하며 국회 의원 소환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무렵 임시 수도 부산의 거리는 군중들의 개헌 문제를 둘러싼 시위로 어수선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나라 최초의 시·읍·면의원 선거가 1952년 4월 25일에 실시되었고, 뒤이어 도의원 선거는 5월 10일에 실시되었다.

1952년 5월 25일 부산과 경상남도·경상북도 일대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계엄령의 명분은 잔여 공비 소탕이라고 언명되었다. 다음 날 50여 명이 탄 국회 의원 통근 버스가 헌병대로 연행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항의하여 야당과 재야인사들이 반독재 구국 선언 대회를 개최하려 하였지만 괴한들이 습격하여 대회가 무산되었다. 국회 앞에서는 전국 지방 대표 1,400여 명이 모여 국회를 포위하고 농성을 벌였다. 이들의 주장은 ‘진정한 민의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의 통과와 현 국회의 해산에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여당과 정부에 의해 조작된 주장으로 국민의 바람과는 달랐다.

국회 의장 장택상(張澤相)은 국회와 정부의 개헌안을 절충한 이른바 ‘발췌 개헌안’을 마련하였다. 주요 내용은 대통령 직선제, 상하 양원제, 국무총리의 제청에 의한 국무 위원의 임명과 면직, 국무 위원에 대한 국회의 불신임 결의권 등이었다. 이 ‘발췌 개헌안’은 1952년 6월 24일 밤 삼엄한 헌병·경찰의 호위 아래, 국회 재적 의원 185명 중 166명이 출석하여 찬성 163표, 기권 3표로 통과되었다. 이 개헌안이 통과된 지 39일 만인 1952년 8월 5일 국민 직선의 정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이승만은 총 투표 수의 72% 지지로 당선되었고, 부통령에는 자유당의 이범석(李範奭)을 제치고 이승만이 지지해 준 무소속의 함태영(咸台永)이 당선되었다.

휴전 반대 시위

1951년 7월부터 휴전 회담이 개막되자 이를 반대하는 시위가 임시 수도 부산을 중심으로 남한 곳곳에서 일어났다. 정부 청사와 국회 앞에서는 매일같이 휴전 결사반대 국민 총궐기 대회가 개최되었다. 반대 시위는 유엔 기관 앞에서도 자주 일어났다. 휴전 성립의 최대 난관이었던 포로 교환 협정은 1953년 6월 8일에 체결되었다.

환도

중앙 부처들은 농림부, 공보처, 내무부, 국방부, 체신부, 법무부, 기획처 등의 순으로 속속 환도하였다. 1953년 7월 27일에 이르러 유엔군 대표 해리슨 중장과 공산 측 대표 남일 사이에 휴전 협정이 성립되었다. 이로써 3년여에 걸친 6·25 전쟁은 마무리되었다. 정부의 공식적인 환도는 1951년 8월 15일 서울에서 8·15 기념식을 주관하고 난 뒤부터이다. 국회는 9월 1일에 환도하였다. 이로써 전쟁 기간 중 대한민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 부산, 임시 수도 부산의 약 1000일 간의 임무는 종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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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동[195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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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임시수도정부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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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 수도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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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 국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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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동[195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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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저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제공처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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